영화 <블랙 스완>은 발레단 내의 경쟁을 소재로 한 사이코스릴러죠. 발레작품 ‘백조의 호수’의 주역을 따내려고 발레리나들끼리 벌이는 ‘암투’가 그려집니다. 

 그런데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 발레리나였던 아나스타샤 볼로슈코바는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톱스타일때 엄청난 질투와 험담이 따라다녔어요.영화 <블랙스완>에 나온 얘기요? 볼쇼이에서 벌어지는 암투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a little flower)에요.”

 또다른 볼쇼이 출신 스타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 룬키나는 “어느 극장에서나 경쟁과 질투는 벌어지지만, 이번 황산테러는 너무나도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개탄하네요. 



                                                  (러시아 TV방송과 인터뷰 중인 세르게이 필린 볼쇼이 발레단 예술감독)



                                         


 러시아 볼쇼에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얼굴에 황산테러를 당한 사건 이후, 볼쇼이의 화려한 무대 뒤의 추악한 권력투쟁이 러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언론들의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예술단의 명성을 고려하면 상당히 불행한 일이죠. 

 세르게이 필린 볼쇼이 발레단 예술감독(42)은 지난달 18일 모스크바 자택에 귀가하던 중 괴한이 던진 황산병에 맞아서 얼굴과 목에 3도 화상을 입고 시력을 잃을 위기입니다. 필린 감독은 3일 BBC와 인터뷰에서 “나는 나를 공격한 이를 알고 있지만, 경찰의 조사발표가 나올 때까지는 이름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네요. 질투와 야심을 품은 내부자의 범행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필린 감독은 솔로이스트 무용수를 미국인을 비롯해 볼쇼이 바깥에서 데려오면서 발레단 내에서 상당한 반발을 샀다고 하죠. 



                                      (4일 아내 마리아와 함께 모스크바 공항에서 독일행 항공편으로 이동하는 필린 볼쇼이 예술감독. 사진:AP)


                                               (필린의 공연 모습.      사진: AFP)



 눈을 잃으면 커리어를 잃는 그의 심정은 지금 어떨까요. 볼쇼이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시작해 1988년 발레단에 입단, 수석 발레리노를 거쳐 2011년 3월 예술감독이 된 그는 평생 발레밖에 모르는 사람일텐데요. 그는 이번주에 독일로 가서 오른쪽 눈의 시력을 구하는 수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신부님께 나는 그들을 용서했고 하느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군요. 



                                           (니콜라이 치스카리체, '세헤라자데' 볼쇼이 공연 모습. )



 현재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는 볼쇼이의 또다른 대표적 무용수인 니콜라이 치스카리체(40)가 꼽히는 듯합니다. 

 그는 지난 수년간 극장 총감독인 아나톨리 익사노프와 필린 감독에 대해 극장운영의 실패와 부패 등의 혐의를 줄곧 제기해왔던 인물입니다. 10억달러 들여서 6년만인 2011년 끝낸 볼쇼이 극장의 리노베이션 공사에 대해서도 ‘터키식 호텔’같다(깊이가 없는 싸구려같다는 의미로 쓰인듯)고 독설을 퍼부었다죠.

 그는 예술감독직을 놓고 필린과 경쟁했던 사이입니다. 두달 전 그의 팬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필린을 해임하고 치스카리체가 임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죠. 

 황산테러 사건 당시 그는 다른 극장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와 관계된 이가 필린을 겨냥해 테러를 벌였을 가능성에 경찰은 주목하고 있습니다. 


 


(볼쇼이 극장의 내부 모습) 



 치스카리체는 이번 테러 공격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문제를 볼쇼이의 리더십에 돌렸습니다. “내부자 소행이라고 얘기하는 순간 그들은 볼쇼이의 유구한 역사와 볼쇼이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을 모욕했다”고 말했군요. 

 볼쇼이 내에서는 그가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는 모양입니다. 한 무용수는 집에 마약을 심어서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네요.



 치스카리체의 비판은 귀기울일 만한 지점이 있는데요. 극장 리노베이션은 화려하게 됐지만 정작 무용수들의 리허설 공간은 줄어들었고, 극장 앞줄 티켓은 2만2000루블(미화 700달러)에 팔리지만 대부분의 발레리나들의 급여는 하급 공무원 수준에 그쳐 ‘분배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겁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발레단도 자본주의의 잘못된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오죠. 2003년 볼쇼이에서 ‘뚱뚱하다’며 해고됐던 볼로슈코바는 “볼쇼이 여자 무용수들이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부호)들의 파티에서 에스코트 역할을 했다”고 폭로해서 발레단을 발칵 뒤집은 일도 있었습니다. 

 볼쇼이 발레단은 1995년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30년만에 예술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 상당한 잡음이 밖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냉전시대 철의 장막에 가려져있던 무대 뒤의 모습이 노골적일만큼 드러났죠. 2000년 이후 예술감독만 세 번이 바뀐 것도 발레단의 불안정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죠. 2008년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습관과 전통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며 물러났고, 2009년에는 알렉산데르 베데르니코프 음악감독이 “발레단 측이 관료적인 이익을 예술적 이익보다 먼저 고려하고 있다”면서 이탈리아 순회공연 첫 날 사임했다죠. 필린 예술감독의 전임자인 게나디 야닌은 동성애와 관련된 자신의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사임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도 누군가 악의적으로 야닌의 사진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제기된 적이 있죠. 



                                           (백조의 호수에서 공연 중인 스베틀라나 룬키나)


 게다가 지난달 29일엔 볼쇼이의 스타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 룬키나가 제작자인 남편의 영화투자 사업과 관련해 신변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러시아로 귀국하지 않고 캐나다에 머물겠다고 밝히면서 볼쇼이를 둘러싼 위기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국내 일부 언론에서는 룬키나가 용의자여서 귀국을 기피하고 있다고 보도한 모양인데, 원문 텍스트 중에는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없어요. 오역이 아닐까 싶네요. 


 현재 발레단은 <백조의 호수>를 공연 중이지만, 내달 무대에 올릴 예정이던 <봄의 제전> 공연은 연기한 상태입니다.

 1776년 창단 이래 프랑스 나폴레옹의 침공과 러시아혁명과 볼셰비키 정권과 구소련 붕괴에도 살아남은 예술단의 명성 역시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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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