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로 출장 와서 비행시간까지 포함해 2박3일간 한국말을 못했더니, 줄창 양식만 먹던 끝에 신김치를 송송 썰어넣은 청국장 한 그릇이 간절한 만큼이나 모국어로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모국어가 아닌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의 외로움에 관한 것이었다. 

바버라 애런라이크가 <긍정의 배신>에서 묘사했던 세일즈맨의 외로움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아무도 아는 곳 없는 타지에서 거절당할지 모르는 제안을 들고 종종거려야 하는 이들에게는 일단 뭔가 믿을 구석이 필요하다. “당신이 제대로만 갈구한다면 온 우주가 당신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라는 포르투갈 작가 파울로 코엘류의 슬로건이 대중에게 팔리는 것은, 사실 그만큼이나 내 뜻대로 굴러가는 일이 없는 현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이 같은 교훈을 배우기에 인류의 역사가 너무 짧았을까. 과학자 칼 세이건은 우리가 얼마나 찰나적 존재인지를 ‘1년’의 시간에 빗대면서 우주력으로 대폭발이 1월1일에 일어났다면, 12월31일 오후 11시59분 56초경 유클리드기하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로마제국과 예수의 탄생을 보게 됐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렇게 따져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더 짧은 셈이다. 그리고 그만큼 ‘지속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신자유주의의 격랑이 청년층의 일자리를 집어삼키고 저소득층을 양산하는 시기에 코엘류가 부상한 것은 분명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불안이 높을수록 사람들은 근거없는 비관만큼이나 대책없는 낙관에 곧잘 솔깃한다. 

미·소 양극체제가 붕괴했을 때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는 끝났다”는 문구와 함께 더 이상의 변혁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석학대접을 받았다. 금융 리스크를 분산시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서브프라임모기지 채권을 파생금융상품으로 팔던 은행들은 새로운 금융공학의 선두주자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스가 2001년 유로존에 편법을 쓰면서까지 들어간 것도 ‘가입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들인가. 세계화로 가속까지 붙어 무섭도록 변하는 세상에서 자기 나름의 가늠자를 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들은 자기 멋대로 미래를 재단해놓고는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음 속에 은밀하게 ‘바벨탑 쌓기’를 하면서 신이 관장하는 ‘미래’라는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역사책을 들춰보면 이 같은 오만함을 묘사한 부분에 뒤이어 ‘제국의 몰락’ 같은 내용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도 말이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그리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인 아크로폴리스가 언덕 위에서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멸망한 문명의 유적을 머리 위에 짊어지고 살면서도 실수를 반복하는 게 인간이구나 싶다. 

(201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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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