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노선

기자칼럼 2013.06.18 19:17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두꺼운 수학문제지와 씨름하는 시간이었다. 무더운 도서관에서 연습장에 연필로 사각사각 한 문제씩 풀어나가면서, 다음 시험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우미양가’ 중 ‘우’를 받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미’만 맴맴 돌아서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다. 수학문제지에는 손때가 진해져갔고, 다 쓴 연습장은 한 권 두 권씩 쌓여갔다. 그런데 방학이 끝난 뒤 첫 시험, 나는 ‘양’을 받았다. 억울했다.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생각이 들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일까, 아니면 열심히 공부한다고 스스로를 속였던 것일까.


옛 기억이 떠오른 건 <세계전쟁사>에서 ‘마지노선’의 역사적 배경을 읽던 도중이었다. 흔히 양보할 수 없는 최저기준의 비유적 표현으로 많이 쓰는 단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노선은 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가 독일과 국경을 맞댄 동부에 1930~1934년에 걸쳐 만든 요새지대를 일컫는 말이다. 독일이 침공해오면 방벽으로 일단 막아내고 병력을 동원해 반격한다는 전략에 바탕했다. 하지만 독일은 새로운 개념의 전술인 ‘전격전’에 바탕해 빠른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하고, 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벨기에로 우회하는 공격루트를 노출한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가장된 안전의식” 속에 살던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되는 치욕을 당했다.


어떤 노력이라도 근본적인 상황 분석이 먼저 이뤄지지 않는다면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 속의 ‘주술적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다.

최근 시리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이 같은 ‘주술적 행위’는 아닌지 따져보게 된다.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결론이 난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의 평화안 얘기다.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가 총칼로 스러진 사망자가 어린이를 포함해 1만명에 육박하지만 국제사회는 외교적 해법을 고집해왔다. 아랍 세계의 양치기소년 같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겉으로는 평화, 안에서는 피의 진압을 1년째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쌓은 것이 1차대전 이후 또다시 큰 전쟁을 치를 여력이 충분치 않았던 때문인 것처럼, 서방이 시리아 외교해법에만 매달리는 것은 10년간 치른 아프간·이라크전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로 인해 더 이상 군사적 개입을 할 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신중을 갖춘 힘과 신중을 가장한 무능의 차이는 적에게 귀신같이 들키는 법이다. 상대방을 견제할 강력한 힘이 없는 지금, 서방이 시리아를 상대로 둘러치는 외교적 방벽은 아랍판 마지노선에 불과하다.

공권력에 의한 학살을 방관하는 국제사회는 그 자체로 웃음거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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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