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탄생은 아주 작은 ‘결함’에서 비롯됐다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다큐멘터리 <우주 속으로>에서 설명했다. 원자들이 본래 성질대로 가지런하게 제자리에서 등거리를 유지했다면 우주는 영원히 원자들의 집합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개의 원자가 빠진 빈자리가 있었다. 여기서 힘의 균형이 깨졌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시작됐다. 서로 뭉친 원자들은 핵반응으로 무거운 원자들로 거듭났고 별들과 은하계를 구성했다. 새로운 창조는 완벽한 질서가 아니라 결함과 혼란에서 싹튼다는 역설적인 신의 섭리이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기차’는 결함과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 인공적이고 강박적인 질서와 균형의 세계이다. 인재로 빙하기에 빠진 지구에서 ‘노아의 방주’가 된 열차를 설계한 대재벌 윌 포드는 그 질서를 총괄하며 군림한다. 기차 생태계 안에서 모든 승객은 계급에 따라 “각자의 자리”가 있으며, 승객의 숫자는 의도적으로 ‘조절’된다. 하지만 이는 원자들을 제자리에 묶어놓으려는 시도만큼이나 덧없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어김없기 때문이다. 기차 앞칸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 구축된 질서는 그에 상응하는 무질서를 기차 뒤칸에 쌓아올린다. 결국 기차는 문자 그대로 전복된다.



설국열차.



극단적인 합리주의가 추구하는 완벽한 통제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신조차 우주를 만들 때 불완전함을 필수양념으로 치지 않았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완벽한 질서와 균형을 갈구한다. 혼돈한 세상에서 단 한 뼘짜리라도 마음 둘 곳을 갖고 싶은 것이다. 일본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진과 화산 위에서 살면서 흐트러짐 없이 극도로 정제된 형태의 문화예술을 만든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전통예술 ‘노’(能)의 정적에 가까운 아름다움, 전통씨름 스모 경기에 앞서 행해지는 정교한 의식, 작은 화폭 안에 세밀한 필체로 그리는 그림 등은 이 같은 욕망을 반영한다. 예술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질서에 대한 정치적 갈망이 극단화된 전체주의는 설국열차 꼬리칸 승객들 같은 약자들에게 크나큰 고통이 된다. 사회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유태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을 탄압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과 무관한 집단적 주술행위에 불과하다.


(경향DB)



하지만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완벽한 통제에 대한 욕망을 좀처럼 이기지 못한다. 통제광이 되어가는 한국사회가 그렇다.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부모도,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대기업도, 인터넷게임 시간까지 시시콜콜하게 정해주는 정부는 무엇을 얻기 위해 균형과 질서를 추구하는가. 응축이 절정에 달한 별이 펑 터져 우주로 사라지는 것처럼, 설국열차는 통제 절정의 순간에 무너져내렸다. 불균형의 상태는 조금도 용납하려 들지 않으면서 창조를 강조하는 ‘거저 먹으려는 심보’로는 기차는 오래 굴러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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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