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네트워크에서는 ‘고양이를 기르며 전문직에 종사하는 20~30대 미혼 독거 남녀’들이 상당히 많다. 어린 고양이를 입양해 배변훈련에 애를 먹으며 투닥투닥 한가족이 되어가는 소소한 일상들을 온라인 이웃들과 공유한다. 집고양이를 기르지 않는 ‘캣맘’들도 있다. 길고양이들에게 사료와 물을 주면서 돌보는 박애주의자들이다. 고양이 열풍이 드디어 정점에 달했다고 느낀 것은 원조 ‘키보드워리어’이자 서늘한 지성의 소유자인 진중권 교수가 지난해 죽어가던 아기 고양이를 거둬 치료한 뒤 ‘루비’라는 이름을 붙여 입양하면서였다. 진 교수가 루비의 사진에 귀여운 스티커들을 잔뜩 장식해 공개했을 때, 심지어 트위터 계정의 자기소개 사진에 자신의 얼굴은 뎅겅 편집한 채 팔 안의 루비만을 내걸었을 때, 사람들은 루비의 그 무엇이 진 교수를 그토록 바꿔놓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루비라는 ‘요망한 것’이 진 교수를 홀렸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경향DB)



그러니까 한 30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고양이에 대한 대접은 크게 달라진 셈이다. 어릴 적 할머니의 가게에서 기르던 고양이의 용도는 오로지 ‘쥐잡기’였다. 오징어포 하나 찢어서 먹여주려는데 ‘캬웅’ 하면서 발톱으로 내 손등을 긁어 피가 방울방울 났을 정도로 ‘야생’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


고양이에 대한 온갖 속설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고양이는 요물이라 못살게 괴롭히면 쥐나 새를 잡아서 부엌이나 마룻돌 앞에 가져다 놓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 입장에서는 사과의 뜻으로 주인에게 자신의 맛난 별식을 바치려는 깊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양이가 열이 오른 환자의 가슴팍에 앉아서 ‘생명을 빨아들인다’는 미신도 있었다. 물론 뜨뜻하게 웅크릴 곳이라면 노트북 위부터 자동차 아래까지 장소를 불문하는 고양이의 습성을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아한 유연미를 타고난 고양이는 예전에는 각종 관절환자들의 약재로도 쓰이곤 했다. 그 사실을 안 건 1990년대 초반 등굣길에 있던 허름한 시장에서 털을 불로 지져 제거한 벌건 무엇의 정체를 호기심에 다가가 확인하고 나서였다. (옆에는 보신탕용 개도 있었다. 그 충격이란.) 게다가 고양이들이 ‘앵알앵알’거리며 우는 소리가 꼭 아기 우는 흉내 같다며 기분 나빠했던 어른들도 있었다. 고양이들을 위한 뜨거운 사랑의 계절이라는 얘기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물론 들려주지 않았다.


한 세대 사이에 고양이들에 대한 대접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부적 영향으로는 일본 문화와의 교류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일본인들에게 복을 부르는 마스코트는 ‘마네키네코’, 손을 까딱까딱 흔드는 복고양이다. ‘헬로키티’를 비롯해 일본 만화에는 고양이들의 귀여움을 극대화해 표현한 그림들이 많다. 10대부터 일본 문화를 접하고 자란 30대들에게 고양이는 더 이상 요물이 아닌 셈이다. 독거인구의 증가 역시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들이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개에 비해 독립성이 강한 고양이는 주인(이라고 쓰고 집사라고 읽는다)이 오랜 시간 집을 비워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젊은 세대는 고양이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자의식이 강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강아지처럼 친근하게 구는 특성들 말이다. 또 길 위의 고양이들을 볼 때면 나는 냉혹한 노동시장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하는 젊은 세대 비정규직의 고단한 삶을 연상하곤 한다. 현실의 고립감은 우리를 짓눌러 서로에게 ‘안녕하십니까’ 묻게 만든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고양이를 돌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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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