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수업

기자칼럼 2015.05.12 11:34

꼬마 때부터 발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배우기를 미뤘다. 가장 큰 장애물은 ‘내가 본 거울 속의 내 몸’이었다. 짧은 다리에 통허리, 운동으로도 좀처럼 덜어내기 어려운 ‘맥주의 업보’이자 사무직의 ‘평생 친구’인 볼록한 아랫배는 당최 발레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영국 방송프로그램 <빅 발레> 중 한 장면.




그러다 새해 어느 휴일, 낮잠에서 깨어나려던 찰나에 번개 같은 확신이 정수리를 강타했다. ‘숨 끊어지면 먼지로 돌아갈 이 몸이 무엇이기에 나는 발레 한번 배우지 않고 이 삶을 마감하는가’라고 마지막 눈감는 순간 회한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곤란했다.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를 원망하지 않도록 나는 얼마 뒤 동네 발레학원 문을 두드렸다.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대수술이라도 결심한 듯한 비장한 표정으로 나타난 방문객에게 약간 놀란 듯했다. 그는 입문반에서 한 달을 경험해본 뒤 발레를 배울지 말지를 결정할 것을 권했지만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신용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석 달, 선등록해주세요.”


준비물 구입에 나섰다. 수영에는 수영복이 있듯 발레에는 ‘레오타드’가 있다. 발레용품 직원은 내게 스몰 사이즈를 권했다. 착의실에서 낑낑거리며 옷을 위로 끌어올린 뒤 거울을 살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이 볼록 나온 아랫배를 거쳐 정직하게 그림자를 빚어내고 있었다. 이러다 봉제선이라도 터지면 꼼짝없이 돈을 물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조바심에 나는 “미디엄 사이즈! 미디엄 갖다주세요!”를 수줍게 외쳤다. 발레 ‘요정’들은 도대체 얼마나 작고 섬세한 몸을 가진 것인가. 연습용 천신발 역시 두 사이즈 반이 더 큰 것을 신은 뒤에야 발가락을 펼 수 있었다. 조금 시무룩해졌다. 발레 나라의 코끼리라도 된 것만 같았다. 


잔뜩 긴장한 2월 첫 수업일, 복장을 갖추고 스튜디오로 쭈삣거리며 발을 디뎠다. 열 명 남짓한 여성들이 하늘색 운동매트에 앉아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뒤쪽으로 냉큼 자리를 잡고는 스트레칭을 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다들 어색한 모양이다. 긴장이 풀리면서 은근한 동지애가 물에 보름 불린 콩처럼 가슴에서 움트는 듯했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편안하게 만족감을 느끼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할 때는 “그 정도면 괜찮은데 무슨 걱정이세요”라고 곁에서 토닥거리다가도 정작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비난하고 호통친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자신에게는 가혹하다. 자신을 비난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유년기에는 생존전략으로 유효하지만 성년기에는 극복의 대상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열심히 하다 보면 나의 입술도 무릎을 만날 수 있겠지... ㅠㅠ



주 2회 발레수업을 하며 그렇게 몸을 통해 깨닫는 것들이 생겨났다. 일단 근육의 부피와 힘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무거운 바벨도 곧잘 들어올리는 편인데 맨손으로 하는 발레의 기본동작은 쉽지 않았다. 우아하고 느린 움직임은 매우 강한 근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팔을 옆으로 드는 동작도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빨래짜듯 근육을 비틀어’야 제 모양이 나왔다. 한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차는 동작도 바닥을 디딘 다리가 ‘엉덩이에 쥐날 듯한 느낌’으로 힘을 줄 때에만 가능하다.


‘갈비뼈는 잠그고, 아랫배는 넣고, 어깻죽지는 뒷주머니에 넣는 느낌’으로 기본자세를 가다듬어도 피케, 아라베스크, 주테를 비롯한 여러 동작 속에 헤매다보면 어느 순간 자세가 무너져있었다. 아마도 초심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까치발을 드는 렐르베 동작 때 ‘균형을 잃으면 어떡하지’라고 자신감을 잃으면 십중팔구는 어김없이 휘청이기 마련이었다. 마음과 몸은 연결돼 있으니까. 그리고 모든 이들의 몸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기 마련이다. 거울 너머 나 자신을 향해 웃어본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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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