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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12 여성 혐오 (1)
  2. 2015.05.12 발레 수업
  3. 2015.01.23 가혹한 멘토들
  4. 2014.10.31 늙는다는 것
  5. 2014.09.19 ‘개저씨’ (2)
  6. 2014.08.08 털 뽑기
  7. 2014.06.27 유령의 프레임
  8. 2014.05.16 의심하라!
  9. 2014.03.28 영원한 쓰레기
  10. 2014.02.15 고양이를 돌보는 이유 (1)

여성 혐오

기자칼럼 2015.05.12 11:38

주말이면 옛 한국 영화를 본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모으고 복원해 온라인에 공개해놨다. 1960~1980년대 시대상을 타임머신 탄 듯 관찰하면 현재를 낯설게 바라보게 되는데, 동시대의 ‘날줄’만으로는 잡을 수 없던 생각의 ‘씨줄’이 손끝에 닿는다.


여성상은 그 씨줄의 한 가닥이다. <오발탄>(1961)에서 해방촌의 명숙은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양공주’가 된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에서 식모였던 주인공은 사고로 한 팔을 잃고는 종로 뒷골목으로 흘러든다. <뽕>(1986)은 가난하고 억척스러운 인협이 일제 치하 산골에서 몸 파는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상류층 여성이 등장하는 <맨발의 청춘>(1964)같은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여성들은 가난의 최전선에서 힘겹게 버텨낸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 영자는 자신의 힘으로 삶을 일궈내고 싶어한다. 그는 운전 기술을 배워서 차를 몰며 결혼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그가 그나마 얻을 수 있던 일자리는 식모, 저임금 직공이나 버스 차장같이 기술습득의 비용이 들지 않는 일자리 뿐이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에는 온기가 어려 있다. 여성의 아름다운 몸을 욕망하고 손찌검하고 차별하다가도 끝내 기구한 삶을 동정하고 연민한다. 얼핏 모순적인 이 같은 태도는 여성 가족구성원의 희생에 대한 한국 남성들의 집단적 부채의식, 그러니까 미안함과 죄의식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희생했고, 딸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오빠나 남동생에게 양보하고 공장 노동자와 식모같이 저임금의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가부장사회에서 한 가족이 성공을 꾀할 때, 집중된 자원의 수혜를 입는 쪽은 대개 남성이었다. 자동차 운전을 배워 성공하겠다던 영자가 학원비가 없어 포기했던 것처럼, 여성들에게 현실은 좀체 벗어날 수 없던 강력한 중력장이었다.

이들 영화와 비교하면 오늘날 여성에 대한 싸늘한 온도는 두드러진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된장녀’ ‘김치녀’ 같은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최근 모 개그맨의 여성 비하 발언은 글로 옮기기 참담할 지경이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수준의 혐오는 이미 오프라인으로 울타리를 넘었다. 각종 TV쇼에서는 재능있는 여성 희극인들을 ‘오크녀’인 주제에 예쁜 척한다며 웃음거리로 만든다. 지상파의 막장드라마에는 욕심 많고 그악스러운 여성 캐릭터가 시청률 상승을 위한 ‘욕받이 무녀’처럼 등장한다. <무한도전> <1박2일> 같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은 남성천하다. 한국 영화산업은 2013년 매출 1조8839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지만 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여성혐오의 여러 사회적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괜찮은 일자리’ 부족이 아닐까. 남성에게 여성은 연민이 아닌 경쟁 상대이다. 1990년 33.2%였던 대학진학률은 2008년 83.8%로 정점을 찍었다. 2009년에는 남학생보다 더 많은 여학생이 고등교육에 진입했다. 여성고용률은 지난해 54.9%로 30여년 만에 13%포인트 넘게 늘었다. 하지만 일자리는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비정규직화됐고 청년실업률은 올 3월 10.7%로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양성평등은 그렇잖아도 작아진 ‘밥그릇’을 나누자는 고까운 얘기로 들릴 것이다.

노동시장 변화 여파로 달라진 결혼과 연애의 룰도 남성들에게는 불편하다. 일부일처제가 대부분의 남성에게 허용됐던 시기는 인류사상 2차 세계대전 이후 폭발적 경제성장기에 불과했다. 빈부격차가 큰 사회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안정적 파트너를 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구조는 멀고 개인은 가깝다보니, ‘거절’에 좌절한 남자들은 여자를 미워한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한 랍비는 카인이 아벨을 죽도록 미워한 이유가 ‘여자’(성), ‘땅’(경제), ‘정체성’(인정욕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의 여성혐오는 그 중 ‘성’과 ‘경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문화시민이라면 아무 데서나 배설하지 않듯이 대중을 상대로 혐오같은 부정적 감정을 투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같은 룰은 점점 희미해지는 듯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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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발레 수업

기자칼럼 2015.05.12 11:34

꼬마 때부터 발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배우기를 미뤘다. 가장 큰 장애물은 ‘내가 본 거울 속의 내 몸’이었다. 짧은 다리에 통허리, 운동으로도 좀처럼 덜어내기 어려운 ‘맥주의 업보’이자 사무직의 ‘평생 친구’인 볼록한 아랫배는 당최 발레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영국 방송프로그램 <빅 발레> 중 한 장면.




그러다 새해 어느 휴일, 낮잠에서 깨어나려던 찰나에 번개 같은 확신이 정수리를 강타했다. ‘숨 끊어지면 먼지로 돌아갈 이 몸이 무엇이기에 나는 발레 한번 배우지 않고 이 삶을 마감하는가’라고 마지막 눈감는 순간 회한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곤란했다.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를 원망하지 않도록 나는 얼마 뒤 동네 발레학원 문을 두드렸다.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대수술이라도 결심한 듯한 비장한 표정으로 나타난 방문객에게 약간 놀란 듯했다. 그는 입문반에서 한 달을 경험해본 뒤 발레를 배울지 말지를 결정할 것을 권했지만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신용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석 달, 선등록해주세요.”


준비물 구입에 나섰다. 수영에는 수영복이 있듯 발레에는 ‘레오타드’가 있다. 발레용품 직원은 내게 스몰 사이즈를 권했다. 착의실에서 낑낑거리며 옷을 위로 끌어올린 뒤 거울을 살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이 볼록 나온 아랫배를 거쳐 정직하게 그림자를 빚어내고 있었다. 이러다 봉제선이라도 터지면 꼼짝없이 돈을 물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조바심에 나는 “미디엄 사이즈! 미디엄 갖다주세요!”를 수줍게 외쳤다. 발레 ‘요정’들은 도대체 얼마나 작고 섬세한 몸을 가진 것인가. 연습용 천신발 역시 두 사이즈 반이 더 큰 것을 신은 뒤에야 발가락을 펼 수 있었다. 조금 시무룩해졌다. 발레 나라의 코끼리라도 된 것만 같았다. 


잔뜩 긴장한 2월 첫 수업일, 복장을 갖추고 스튜디오로 쭈삣거리며 발을 디뎠다. 열 명 남짓한 여성들이 하늘색 운동매트에 앉아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뒤쪽으로 냉큼 자리를 잡고는 스트레칭을 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다들 어색한 모양이다. 긴장이 풀리면서 은근한 동지애가 물에 보름 불린 콩처럼 가슴에서 움트는 듯했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편안하게 만족감을 느끼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할 때는 “그 정도면 괜찮은데 무슨 걱정이세요”라고 곁에서 토닥거리다가도 정작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비난하고 호통친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자신에게는 가혹하다. 자신을 비난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유년기에는 생존전략으로 유효하지만 성년기에는 극복의 대상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열심히 하다 보면 나의 입술도 무릎을 만날 수 있겠지... ㅠㅠ



주 2회 발레수업을 하며 그렇게 몸을 통해 깨닫는 것들이 생겨났다. 일단 근육의 부피와 힘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무거운 바벨도 곧잘 들어올리는 편인데 맨손으로 하는 발레의 기본동작은 쉽지 않았다. 우아하고 느린 움직임은 매우 강한 근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팔을 옆으로 드는 동작도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빨래짜듯 근육을 비틀어’야 제 모양이 나왔다. 한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차는 동작도 바닥을 디딘 다리가 ‘엉덩이에 쥐날 듯한 느낌’으로 힘을 줄 때에만 가능하다.


‘갈비뼈는 잠그고, 아랫배는 넣고, 어깻죽지는 뒷주머니에 넣는 느낌’으로 기본자세를 가다듬어도 피케, 아라베스크, 주테를 비롯한 여러 동작 속에 헤매다보면 어느 순간 자세가 무너져있었다. 아마도 초심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까치발을 드는 렐르베 동작 때 ‘균형을 잃으면 어떡하지’라고 자신감을 잃으면 십중팔구는 어김없이 휘청이기 마련이었다. 마음과 몸은 연결돼 있으니까. 그리고 모든 이들의 몸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기 마련이다. 거울 너머 나 자신을 향해 웃어본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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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결혼하면 돈이 생긴다.” 지난달 서강대 강연에서 한 정치인이 주장했다.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출산지원금 20만원이 나온다는 부연설명까지 덧붙였다. 많은 청년들이 이 발언에 분노했다. 청년실업률이 9%에 육박하는 데 대해 집권당 관계자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그의 발언은 청년들을 향한 ‘어르신들의 꾸지람’ 중 한 사례에 불과하다. 비슷한 얘기들이 우리 사회에는 횡행한다. “젊은이들이 편한 일자리만 찾는다” “그들이 가난한 것은 소비성향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부류의 기만적 레토릭들이다.

인생 선배랍시고 이 같은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이들은 대개 안정적 삶을 누리는 50대 이상의 중장년 세대이다. 산업화시대에 학점이 바닥을 기었어도 취업기회는 열려 있고, 재산을 모을 여유도 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말의 무게가 허망하다. 그들이 자랑하는 성공의 비결은 현재의 결과에서 거친 귀납법으로 뽑아낸 것들이 불과한데, 보편적인 것인 양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에 불과하다. 그 기저에는 타인을 조종하려는 은밀한 나르시시즘과 싸구려 인정욕구가 깔려 있는 건 아닐까. 고분고분 말을 듣고도 실패해도 ‘그건 너의 탓’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책임지지 않아도 그만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하면 된다’식의 낡은 방식을 대입하기에는 우리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경제환경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경제학자 마이클 멘델은 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경제성장은 혁신을 통해 이뤄지지만 최근 “제약, 로봇, 인공지능, 나노기술 모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진전을 이루지 못한 분야”이다. 정보통신(IT)을 비롯한 최근의 혁신들은 과거 자동차를 비롯한 제조업과 달리 일자리가 크게 늘지 않는다. 취업자는 줄어드는데 소비자는 필요한 자본주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태어나서 대체로 고성장 시대를 산 중장년층과 달리 20대 청년들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저성장 속에 살 가능성이 높다. 이는 ‘4인가구’ 핵가족으로 상징되는 고도 성장기의 각종 사회적 룰이 변화의 압력에 놓인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젊은이들이 취업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고 타박할 수 있을까.

‘하면 된다’는 어쩌면 ‘수탈’을 최적화하기 위한 담론이다. 아르바이트로, 인턴으로, 수습으로, 비정규직으로 조금만 더 고생하면 구직의 문이 열릴 것이고 안정적 일자리라는 미래를 얻을 것이라며 희망을 눈앞에 딸랑이는 식이다. 그렇게 노동을 착취해서 이득을 얻는 이들이 대체로 담론을 유포하는 이들과 겹친다는 점에 있어서 이는 사기에 가깝다. 하지만 노동시장에서 탈락하는 청년들에게는 ‘개인의 실패’라는 딱지가 간편하게 붙는다. 수치심을 안은 청년들은 침묵하고 만다. 취업을 하더라도 집을 얻고 가족을 꾸리는 수준의 소득을 얻기는 난망하다.

15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 정부 업무보고 및 경제혁신 3개년 계획 2차 회의에 참석한 정부부처 및 기업, 대학 등 관계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출처 : 경향DB)


가장 큰 잘못은 정부에 있다. 국가의 한 세대 뒤 미래를 내다본다면 젊은층을 이렇게 착취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재정과 복지, 노동정책을 짜는 관료들은 온통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1970년대 산업화시대의 논리에 푹 절여진 듯하다. 급속한 인구고령화가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도 기업들의 법인세는 못 올리겠다는 식이다. 현상을 거칠게 한마디로 하면 ‘재벌에 점령된 수탈적 경제체제’나 다름없다. 식민지처럼 한 나라의 에너지와 노동력을 털어먹고 상품이나 팔면 그만이라는 식인가.

게다가 지금의 젊은 세대는 고령화사회를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득하다. “10여년 일찍 태어난 게 요즘은 죄스러울 정도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40대 초반 직장인의 고백을 듣고 나니 생각은 더 복잡해지기만 한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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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늙는다는 것

기자칼럼 2014.10.31 22:00

심하게 체해 동네 병원을 찾았다. 병상에 누워 똑똑 떨어지는 노란 포도당 링거 주사를 맞고 있자니 진료실의 대화가 아득하게 들렸다. 환자 중에는 노인이 많았다. ‘어디가 아프세요’라는 의사의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과거 복용했던 약과 겪은 수술을 굽이굽이 거쳐 요즘은 밥을 잘 못 먹고 요기가 결리고 저기가 쑤시고 같은 통증의 호소로 이어지고는 했다. 상냥한 의사와의 대화는 ‘고맙다’는 인사로 마침표를 찍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한결 밝아진 듯했다.

이 나라에서 노인들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프고, 돈도 없고, 외롭기까지 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만성질환이 없는 경우는 100명 중 5명도 채 되지 않는다. 노인가구 절반 이상의 가처분소득이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친다는 한 경제연구원 보고서도 있다. 질병관리본부의 최근 성인 우울증 보고서를 들춰보면 70대 노인 100명 중 18명, 60대 노인은 100명 가운데 15명이 최근 1년간 우울증을 경험했다.

은퇴 이후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허탈감과 무기력감에 깊이 갇힌 노인들은 탈출구로 자살을 생각한다. 65세 이상 노인 5명 중 1명이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통계조사도 있다. 하지만 자식으로부터 ‘효도’를 받지 못하는 부모상을 실패로 여기는 유교사회의 영향인지 이들은 선뜻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다. 도움을 요청하려면 생의 패배를 스스로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노인 세대에 선뜻 공감하지 못한다. 무언가에 화가 나는 것조차 자신의 지식범위 안이라는 말처럼, 경험해보지 않으니 모르는 걸까. “콩다방 별다방 같은 젊은이들의 카페에 노인들이 자리하는 게 불쾌하다”는 볼멘소리마저 한다. 공공 공간에서마저 노인은 ‘침해의 당사자’로 소외된다. 마치 백인 전용 공간에서 흑인이라도 만난 듯한 차별이다.

정치지형에 있어서도 노인들은 ‘수구세력의 콘크리트 지지층’쯤으로 치부된다. ‘독재자 박정희’를 영웅시하는 노인들이 사실은 땀 흘려 가난을 벗어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은밀히 애도하고 있다는 점을 진보성향 젊은이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박근혜 대통령을 ‘모욕’한 산케이 신문에 사과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가한 노인들이 단순히 ‘알바 일당’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가늠하지 못한다.

길을 따라 걷는 노인들 (출처 : 경향DB)


한국의 문화와 소비 중심이 온통 ‘틴팝 컬처’, 즉 10~20대의 아이돌 문화가 중심이라는 점 역시 노인세대의 소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짧고 찬란한 젊음을 찬양하는 소비주의 속에 노인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동안’에 대한 무한한 찬사가 재생되는 미디어 공간에서 노인들은 생체시계의 태엽 무게에 굴복한 패자가 될 뿐이다. 외모를 관리할 충분한 물적자본과 시간을 가진 연예인들을 통해 노화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고 대리만족하는 대중에게 있어서 노인은 한없이 매력 없는 존재다. 그나마 노인들에게 위안을 주는 미디어는 종합편성채널이다. 뒷방 늙은이 취급 받던 세대에게 100% 귀기울이면서 주연으로 모시는 거의 유일한 매체 아닌가.

내가 만약 노인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불현듯 프랑스 출장 때 만났던 한 70대 파리지엔 할머니가 생각난다.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또렷이 말하던 그녀는 말끝마다 끄덕이는 나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의 표정에서 외로움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 최소한의 정서적 요구인 소통에서마저도 습관처럼 소외되는 것이 노인의 운명인가. 그렇기에 노인 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하고 귀기울여주는 누군가이다. 아파서도, 가난해서도, 외로워서도 아니라 그저 사람이기 때문에.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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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개저씨’

기자칼럼 2014.09.19 20:30

‘개저씨’. 짐작대로 ‘개’와 ‘아저씨’를 섞은 말이다. 두어달 전쯤 이 신조어를 접했을 때는 혐오적 표현이고 못된 남자를 통칭하기에 과하다 싶었다. 하지만 최근 잇따른 성추행 사건의 용의자들을 일컫는 명칭으로 이만한 게 없지 싶다. 탄탄한 지위에 체면을 점잖게 뒤집어쓰고는 안달난 아랫도리를 간수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개가, 무엇을 잘못했더란 말이냐..."



대한민국의 법을 관리하던 고위공직자 출신으로 국회의장까지 지낸 70대 남성은 골프장에서 20대 초반 여성 캐디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등 성추행해 경찰의 출석요구를 받았다. 그는 “손녀 같고 딸 같아 귀여워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딸이 예쁘다고 젖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아버지가 정상인가. 그렇다면 엄연히 친족 간 성추행이다. 패륜에 무감한 이가 한 나라의 법무장관을 지냈다는 것인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베스트셀러를 펴내면서 20대 청춘들에게 희망을 준 출판사의 한 남성 상무는 ‘청춘이니까 아파야지’로 오독한 듯하다. 기혼자인 그는 정직원 전환을 앞둔 20대 여직원을 자신의 오피스텔로 불러 성추행했다. 직원을 성적 대상화하는 임원이라니. 출판노동자들이 거세게 항의하고서야 회사는 그를 사직처리했다.

이뿐인가. 어린 인턴의 엉덩이를 움켜쥔 성추행이 드러나 낙마한 전 청와대 대변인, 여제자를 성추행하고 군색한 변명 끝에 잘린 모 대학 성악과 교수, 연구생들에게 상습적으로 성희롱 발언과 성추행을 일삼아 해임된 모 대학 교수, 길 위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여고생의 신고로 붙잡혀 낙마한 모 검찰지검장을 비롯해 근래 벌어진 사건들은 헤아리기가 무서울 정도다. 한국 사회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아저씨’들은 기회만 되면 훌러덩 체면을 벗고 짐승이 되길 주저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수치심에 침묵할 테니 자기조절 따위는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남성들은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를 편들고 나서니 의아스럽다. 출판사 성추행 사건에 대해 한 번역가는 트위터에서 “여직원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있지 않았냐”면서 임원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범죄를 완성한 것은 피해자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보이는 성추행은 사실 가해자의 엄밀한 득실계산 끝에 이뤄진다. 새내기 편집자가 좁은 출판계 바닥에서 나쁜 평판을 뒤집어쓰면 직장을 잃고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을 출판사 임원이 몰랐을 리가 없다. 손녀뻘의 캐디가 하늘 같은 고객님의 성추행에 항의했다간 일자리만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노인이 몰랐을 리 없다. 성에 관한 범죄는 대개의 경우 ‘성’은 가해자가 추구하는 부차적 이익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권력’의 쾌감이다. 피해자가 전전긍긍하며 반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상위 권력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차별’에 대한 몰인식이다. 인종, 민족, 종교는 물론이고 성에 대해서도, 상대방에 대한 감수성 훈련이 부족하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미국에서 흑인으로 사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른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노동자들은 많이 배워도, 변변한 직업을 갖고 있어도 성적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을 일상에서 적잖게 겪는다고 호소한다.

지난 수십년간 여성들은 직장과 생활공간에서 이 같은 모욕감을 어금니 꽉 물고 수치심 속에 삼켰지만 이젠 달라졌다. 위의 사건들처럼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피해를 세상에 알릴 것이다. 유독 성추행 소식이 요즘따라 많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달라졌다는 신호다. ‘개저씨’들, 조심해야 한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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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털 뽑기

기자칼럼 2014.08.08 21:00

최근 트위터에서 따끔하게 혼났다. “‘브라질리언 왁싱’이 유행한다는데 포르노 영향으로 사람들이 미쳤나보다”라고 트윗을 날린 게 화근이었다.

사용자들이 항의했다. 그것은 취향일 뿐인데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비난한다는 것이었다. 글을 지우고 사과했다. 취향을 비난하다니, 부끄러운 꼰대질이었다.

‘비키니’ 왁싱은 음부의 털을 왁스를 이용해 뽑는 미용시술이다. 1946년 처음 등장한 비키니 수영복과 뗄 수 없는 관계다. 비키니 하의가 손바닥만 해질수록 뽑는 털의 면적은 반비례로 늘어났다. 털을 완전히 뽑아내는 ‘브라질리언’ 왁싱부터 일부를 남기는 ‘프렌치’ 왁싱, 조금 더 보수적인 ‘아메리칸’ 왁싱 등으로 세분화된다. 털을 남기는 모양(!)에 따라, 가게 따라 부르는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1회 시술에 가격은 10만원 안팎으로 적지 않다. 미국에서 대중화된 것은 2000년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를 통해서였다. 국내에선 최근 모 종편에 출연한 패널들이 왁싱을 언급해 사람들의 호기심이 부쩍 높아진 모양이다.

인간은 동물 중 거의 유일하게 털을 뽑고 자르고 관리한다. 자연을 통제하듯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다. 미용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털과의 전쟁이다. 기원전 4000~3000년 고대 인도에서는 은밀한 부위의 털을 제거했다는 기록이 있고, 중동에서도 ‘위생상’의 이유로 비슷한 관습이 수백년 지속됐다. 서양에서는 복식 밖으로 털이 삐져나오는 것을 부적절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1999년 영화 <노팅 힐> 개봉 행사에서 환하게 웃으며 팔을 흔드는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의 겨드랑이에서 다듬지 않은 털이 발견됐을 때 언론이 호들갑을 떤 적이 있다.

여성의 털 관리는 본인이 좋아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기인한 것일까 (출처 : 경향DB)


하지만 털 관리는 참으로 성가시다. 남자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머리털을 깎고 매일 아침 턱수염을 깎는 사회적 ‘의식’을 거친다. 여성의 경우 관리 면적이 더 넓은 편이다. 풍성한 머리칼을 제외하고는 털 많은 신체는 성적 매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젊음’을 욕망하는 패션 산업이 사춘기 이전의 소녀 같은 신체를 탐닉하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는 주장도 있다. 2차 성징기 이후 자라난 털을 제거함으로써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미국 포르노 산업에서 브라질리언 왁싱이 유독 인기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여성들은 콧수염을 면도기로 깎고, 족집게로 눈썹 털을 정리하고, 제모제로 팔다리 털을 발라내고, 레이저 시술로 겨드랑이 털을 영구제모한다. 여기에다 ‘비키니 왁싱’이 더해졌다. 예뻐지려면 아픈 것쯤은 참아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신체에서 가장 예민한 부위의 털을 뽑아내는 게 건강상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의료계에서는 음모를 뽑거나 면도한 여성들에게서 모낭염이 생길 수 있고, 심한 경우 종기 등이 발생해 외과용 메스로 절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 경고한다. 연약한 피부에 쿠션 역할을 하는 음모를 제거하면 작은 생채기와 감염에 더 취약해질 수도 있다.

이렇듯 여성이 신체를 통제하는 방법과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 제모를 하는 것은 내가 좋아서일까, 아니면 사회적 압력 때문일까.

미 애리조나주립대 여성학자 브리안 파스는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고 10주간 견디기’를 수행한 뒤 소감을 적는 과제를 내줬다고 한다. 텀블러 블로그에서는 ‘털 많은 다리 클럽’의 여성 회원들이 털을 깎지 않은 자신의 다리 사진을 올린다. ‘매끈한 여성’이 되기보다는 ‘내 몸 안에서 편안한 사람’이 되길 택한 것이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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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강력한 프레임은 마치 물처럼 세상 곳곳에 스며든다. 예로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에너지 체제는 문명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저서 <3차 산업혁명>에서 주장한 바 있다. 석탄·석유·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는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용하려면 상당한 군사적 투자와 끊임없는 지정학적 관리”가 필요해서 “중앙집권형 하향식 지휘통제와 대량의 자본집중”이 요구된다. 이 같은 중앙집권형 에너지 인프라는 “경제의 다른 부문 전체에 기본 조건을 설정해주고, 나아가 부문 전체에 걸쳐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이 자리잡도록” 만든다. 석유문화는 현대 금융, 자동차, 건축, 통신에 모두 유사한 중앙집권형 프레임을 이식했다. 그래야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서 여전히 ‘일본 식민주의’가 프레임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는 문창극 총리 지명자가 자진사퇴하기 전까지 공개된 ‘신의 뜻’ 같은 발언들과 그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에서였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남긴 ‘흔적’은 흔적이 아니었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의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푼 점이 있다”는 망언이나 1979년 사쿠라다 다케시 게이단렌 회장의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이다. 36년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 데 있다”는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는 건 아닌가. 현기증이 났다.

자진사퇴한 문창극(출처: 경향DB)


그 ‘36년’의 일본 통치 과정에서 한국인의 의식 프레임에 ‘황국신민주의’가 영향을 끼친 것 아닐까. 일본 식민통치 당시에 유효했던 통치방식을 이후의 정치가 답습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천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국민들이 내면화하도록 교육한 일본의 군인칙유(1882년)와 교육칙어(1890년)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에 국민교육헌장(1968년)에 영향을 미쳤다. 만주국에서 일본이 실험한 중공업 중심의 전투적인 계획경제도 박정희 정권에서 재현됐다. 거대한 생명체인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각 개인의 소중한 삶이 한낱 부품으로 동원되는 국가 중심의 문화도 따지고 보면 일본 식민지배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여성을 ‘성 자원’으로 파악하고 ‘수집, 관리’한 것도 국가주의적 사고였는데, 우리는 축구 경기 해설에서도 여전히 사람을 부품으로 여기는 것처럼 ‘투입’ ‘보강’ ‘교체’ 같은 표현을 쓴다. 정치제도는 민주화를 이뤘지만,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는 여전히 ‘그 무엇’이 남아 있다.

과거 남과 북이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독재정권 체제를 쌍둥이처럼 유지했던 것도 어쩌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정치 체제에서 그 프레임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최고존엄’을 비판하는 것은 순종적 국민들의 ‘미덕’이 아니라며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까지 닮았으니 말이다. 한국 사회가 “군대 갔다와야 사람 된다”는 헛된 만트라를 중얼거리는 것처럼 일본의 우익은 ‘사무라이 정신’을 통해서 일본이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오늘날 자위대에만이라도 참된 일본, 참된 일본인, 참된 무사의 정신이 남아 있기를 꿈꾸었다”며 할복한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말처럼.

과거는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자기분석 없이는 한 사회는 과거의 프레임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달력의 숫자가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순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내일’을 사는 것은 나 개인, 그리고 한 사회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구시대의 식민지 유물을 내 안에서 떨쳐내지 못한다면, 결국 어떤 진정한 변화도 어려운 것은 아닐까. 거대한 숙제를 마주한 것만 같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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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의심하라!

기자칼럼 2014.05.16 21:00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생명이 넘치는 맑은 샘이 지구 어딘가에 있었다. 모두가 이 샘물의 축복을 누렸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들이 접근을 통제한다. 울타리를 치고, 샘을 둘러싼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급기야 특정한 엘리트계급만 샘물을 마실 수 있도록 제한했다. 화가 난 샘물은 그곳을 떠났다. 사람들은 악다구니 같은 권력 다툼에 샘물의 효능이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몇몇의 용감한 사람들이 샘물의 새로운 자리를 찾아내는데, 불행히도 앞의 바보짓이 무한 반복된다.

이 이야기는 월가의 ‘닥터 둠’으로 유명한 마크 파버가 <내일의 금맥>에 적은 투자시장의 속성을 설명한 우화와도 일맥상통한다. 대나무 받침대 위 높은 곳에 커다란 접시가 걸려 있고, 그 위로는 물(중앙은행의 화폐)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다. 그 아래에는 코끼리떼로 비유되는 투자자들이 있다. 코끼리떼가 움직이는 곳으로 접시의 물은 흘러넘친다. 그래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은 언론, 정치, 경제 엘리트를 이용해 코끼리떼를 한쪽으로 몰고 간다. 그렇게 접시의 물이 한곳으로만 쏟아지면서 부동산이든, 원재자든, 채권이든 ‘대형 호재’라고 소문이 난다. 그 순간 거품 붕괴라는 몰락이 시작된다.


경제학자 마크 파버가 강연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위의 두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변주돼왔다. 인간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인간의 복잡한 뇌는 ‘자동 시스템’과 ‘숙고 시스템’의 두 가지 인식체계로 작동한다. 공이 날아오면 피하고 귀여운 아기를 보면 미소짓게 되는 직관적이고도 신속하고 무의식적인 ‘자동 시스템’에 비해 ‘숙고 시스템’은 에너지가 많이 든다. 문맥을 파악하고, 토론하고, 복잡한 논리를 스스로 정립한다. 인체에너지의 20%를 사용하는 뇌는 신뢰할 만한 타인의 결정을 따르는 게으른 방식으로 ‘숙고 시스템’에 들어갈 에너지를 절약한다. 효율을 위한 진화인데, 특히 현대사회처럼 사회 각 부문이 세분화·다변화된 상황에서 항상 논리적으로 요모조모 따져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행동경제학의 발명가 리처드 탈러가 말한 ‘넛지’는 이 같은 맥락과 닿아 있다.

두 이야기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속성은 ‘외로움’이다. 발달심리학자 존 볼비는 “자기 무리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중략) 매우 큰 위험을 초래한다. 따라서 모든 동물이 고립을 피하고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본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고립을 곧 사회적 고통으로 인식한다. 맹수의 날카로운 발톱과 뱀의 독니를 피하기 위해 무리짓던 선사시대의 습성이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99명이 ‘그렇다’고 할 때 ‘아니다’라고 다수에 이의를 제기하는 1명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무리에서 소외될 가능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1명은 당연하다고 여겨져온 것들에 대해 ‘왜?’라는 의심을 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방인처럼 바라볼 것이다. 값비싼 사치품들의 가격이 불황기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가치가 아닌 인간의 허영심에서 비롯됐음을 미국의 사회학자 베블런이 간파했듯이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갖고 용기내어 질문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규칙을 쓰고, 다른 방식의 삶, 다른 방식의 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하라. 바닥이 쩍쩍 갈라진 샘물터 같은 이 나라의 개발주의, 아이들을 오로지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기계의 부품으로 가공해내는 교육체제, 선거를 앞두고 설탕 바른 혓바닥으로 유권자를 농락하는 그들을 의심하라. 그리고 ‘미개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자.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규칙을 써나갈 것이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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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세계 최대 쓰레기 배출국인 미국은 한 사람이 하루 약 3.2㎏의 쓰레기를 매일같이 버리는데, 한 사람당 평생 만들어내는 쓰레기가 102t에 달한다고 한다.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에드워드 흄즈가 저서 <102톤의 물음>에 적은 통계다. 묏자리가 아닌 쓰레기산을 남기고 죽는 셈이다. 미국의 연간 쓰레기 관련 수치를 보면 570만t의 카펫, 350억개의 플라스틱 병, 분해도 재활용도 안되는 862만t의 스티로폼, 20년 동안 5000만가구가 난방할 수 있는 나무가 버려진다. 그 중 고작 2%만 재활용된다.

생산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쓰레기는 더 많다. 미국인 한 명이 먹고 쓰고 때는 음식과 제품, 연료를 만드는데 하수를 빼고도 454t에 가까운 쓰레기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 중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들이 바람과 모래, 비에 풍화될 먼 미래에도 꼿꼿이 형태를 유지할 것이다. 수세대에 걸쳐 태평양에 흘러들어 갈 쓰레기들은 옹기종기 거대한 수렴구역 안에 자리한 거대한 쓰레기 섬을 부풀릴 것이다.


캄보디아로 떠난 이수경의 특별한 일주일(출처 : 경향DB)


내가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봉지를 맛난 해파리로 착각한 물고기가 꿀꺽 삼키곤 배탈이 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친할머니에 관한 오랜 기억을 호출했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생선이며 채소를 담아준 비닐봉지를 비누로 깨끗이 씻어 빨랫줄에 널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며 사각사각 물기가 마른 비닐봉지는 할머니께는 물건을 싸는 유용한 포장재였다. 잘 닦은 사료 포대는 잘라서 고기를 싸고, 지난 연도의 달력은 새 학년 교과서를 감싸는 정갈한 흰옷이 되었다.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습관이 몸에 밴 세대였다.

1900년대 이전에는 우리의 ‘괴나리봇짐’부터 서양의 ‘색’같이 천으로 만든 ‘에코백’이 기본이었고 물류 유통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소비 증가는 폭발적인 쓰레기의 증가로 이어졌다. 대형마트에서 장 본 뒤 냉장고에 물건을 수납하고 난 뒤에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스티로폼 접시부터 랩, 비닐봉지 같은 각종 플라스틱이 한 무더기 쌓인다. 우리가 얼마나 이 ‘썩지 않는’ 물건들을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는지에 관해 전성원은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에 듀폰의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침이 되면 뉴크렐 수지로 코팅된 튜브에서 치약을 짜고 타이넥스 칫솔모로 만든 칫솔로 이를 닦고 코리안 인조대리석으로 만든 싱크대에서 테플론으로 코팅된 프라이팬에 듀폰의 대두 단백질이 포함된 소시지를 요리하고 마일라 필름으로 포장된 슬라이스 치즈로 아침식사를 하고 애필 재질로 만들어진 요구르트 뚜껑을 열어 건강 디저트를 즐긴다. 식사 후에는 쿨맥스와 탁텔 소재로 만든 속옷을 입고 라이크라와 코듀라로 만든 셔츠와 바지를 걸친다. 밤이 되면 듀폰의 폴리에스터 솜으로 충전된 베개와 이불에서 잠든다.”


이 저렴하고 튼튼한 각종 석유 화합물들이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영국왕 헨리 8세가 궁전에 지녔던 물품의 가짓수보다 미국의 평균적인 가정이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게 된 것도 협력과 교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덕이다. 하지만 이후 배출되는 쓰레기들을 생각하면 소비가 마냥 즐거울 수는 없다. ‘쓰레기계의 인디애나 존스’로 불리는 고고학자 빌 랏제가 쓰레기장을 시추해 퍼올린 과거의 쓰레기들을 보면 “25년 전 마지막으로 햇빛을 보았을 구아카몰은 여전히 신선해 보였고” “51년 된 신문은 아직도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물건을 소비하기 전에 이후 생겨날 쓰레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습관. 일단 나부터 실천해볼 생각이다. 그런데 이 칼럼을 마감하면서 비닐 포장재로 싼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자니 왠지 서글프다. 쓰레기 산은 현대인이 후손에게 남기는 불가피한 ‘똥’인 것만 같다. 다만 내 눈에 안 보여서 죄책감을 못 느끼는 것 아닌가.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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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소셜네트워크에서는 ‘고양이를 기르며 전문직에 종사하는 20~30대 미혼 독거 남녀’들이 상당히 많다. 어린 고양이를 입양해 배변훈련에 애를 먹으며 투닥투닥 한가족이 되어가는 소소한 일상들을 온라인 이웃들과 공유한다. 집고양이를 기르지 않는 ‘캣맘’들도 있다. 길고양이들에게 사료와 물을 주면서 돌보는 박애주의자들이다. 고양이 열풍이 드디어 정점에 달했다고 느낀 것은 원조 ‘키보드워리어’이자 서늘한 지성의 소유자인 진중권 교수가 지난해 죽어가던 아기 고양이를 거둬 치료한 뒤 ‘루비’라는 이름을 붙여 입양하면서였다. 진 교수가 루비의 사진에 귀여운 스티커들을 잔뜩 장식해 공개했을 때, 심지어 트위터 계정의 자기소개 사진에 자신의 얼굴은 뎅겅 편집한 채 팔 안의 루비만을 내걸었을 때, 사람들은 루비의 그 무엇이 진 교수를 그토록 바꿔놓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루비라는 ‘요망한 것’이 진 교수를 홀렸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경향DB)



그러니까 한 30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고양이에 대한 대접은 크게 달라진 셈이다. 어릴 적 할머니의 가게에서 기르던 고양이의 용도는 오로지 ‘쥐잡기’였다. 오징어포 하나 찢어서 먹여주려는데 ‘캬웅’ 하면서 발톱으로 내 손등을 긁어 피가 방울방울 났을 정도로 ‘야생’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


고양이에 대한 온갖 속설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고양이는 요물이라 못살게 괴롭히면 쥐나 새를 잡아서 부엌이나 마룻돌 앞에 가져다 놓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 입장에서는 사과의 뜻으로 주인에게 자신의 맛난 별식을 바치려는 깊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양이가 열이 오른 환자의 가슴팍에 앉아서 ‘생명을 빨아들인다’는 미신도 있었다. 물론 뜨뜻하게 웅크릴 곳이라면 노트북 위부터 자동차 아래까지 장소를 불문하는 고양이의 습성을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아한 유연미를 타고난 고양이는 예전에는 각종 관절환자들의 약재로도 쓰이곤 했다. 그 사실을 안 건 1990년대 초반 등굣길에 있던 허름한 시장에서 털을 불로 지져 제거한 벌건 무엇의 정체를 호기심에 다가가 확인하고 나서였다. (옆에는 보신탕용 개도 있었다. 그 충격이란.) 게다가 고양이들이 ‘앵알앵알’거리며 우는 소리가 꼭 아기 우는 흉내 같다며 기분 나빠했던 어른들도 있었다. 고양이들을 위한 뜨거운 사랑의 계절이라는 얘기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물론 들려주지 않았다.


한 세대 사이에 고양이들에 대한 대접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부적 영향으로는 일본 문화와의 교류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일본인들에게 복을 부르는 마스코트는 ‘마네키네코’, 손을 까딱까딱 흔드는 복고양이다. ‘헬로키티’를 비롯해 일본 만화에는 고양이들의 귀여움을 극대화해 표현한 그림들이 많다. 10대부터 일본 문화를 접하고 자란 30대들에게 고양이는 더 이상 요물이 아닌 셈이다. 독거인구의 증가 역시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들이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개에 비해 독립성이 강한 고양이는 주인(이라고 쓰고 집사라고 읽는다)이 오랜 시간 집을 비워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젊은 세대는 고양이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자의식이 강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강아지처럼 친근하게 구는 특성들 말이다. 또 길 위의 고양이들을 볼 때면 나는 냉혹한 노동시장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하는 젊은 세대 비정규직의 고단한 삶을 연상하곤 한다. 현실의 고립감은 우리를 짓눌러 서로에게 ‘안녕하십니까’ 묻게 만든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고양이를 돌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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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