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로 빚은 듯한 턱선을 가진 그는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산산히 조각낸 파시스트 독재자였고,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와 손을 잡고 이탈리아 내 유태인들을 박해한 군인이었다. 1945년 종전 당시 연합군을 피해 스페인으로 탈출하려다 빨치산에게 총살된 그는 푸줏간 고기처럼 밀라노의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렸고, 사람들은 그의 시신에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그는 이탈리아 민중의 손으로 묻은 역사였다. 


 그리고 68년 이후. 종전 이래 최악의 경기침체에 빠진 이탈리아가 그의 유령을 불러내고 있다. 그의 사진을 실은 신년 달력 판매량이 늘고 그의 고향은 공공장소에 그의 이름을 다시 붙이려 움직인다.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 그의 이름이 다시 주류로 돌아오려 하고 있다. 참혹한 과거는 왜 윤색되는가.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무솔리니는 우리가 밥 굶지 않게 해줬죠.” 이탈리아 로마의 한 카페 사장 파스콸레 모레티가 선반에서 무솔리니의 사진이 담긴 신년 달력을 꺼내며 일간 가디언 기자에게 말했다. 달력 사진 중에는 밀밭에서 추수 중인 노동자들과 함께 한 무솔리니가 있다. 올해 78세의 노인인 그는 말한다. “나는 나의 문화를 등질 수가 없어요.”

 이탈리아 내에서 무솔리니의 달력 판매량은 증가세다. 인쇄업체 사장 레나토 치르치는 “10년 전보다 무솔리니의 달력 판매량이 늘었다”면서 “이제는 젊은이들도 이 달력들을 산다”고 말한다. 


 ‘일 두체’(Il Duce·지도자) 무솔리니는 한동안 네오파시스트들의 가슴에 숨은 이름이었다. 이들은 “당신은 유일신”이라는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글귀가 쓰인 책을 읽고 나치의 인사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로마식 인사’를 위해 팔을 뻗었다. 그 중 한 무리가 ‘울트라’로 불리는 축구팬들이었다. 지난해 가을 이탈리아에서는 교육재정 삭감에 항의하던 한 청년단체는 “비바 일 두체”(지도자여 영원하라)를 외치며 학교에 연막탄을 던져넣는 과격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로마 남부의 한 마을은 무솔리니의 호전적인 수하 장교였던 로돌포 그라지아니의 동상을 건립하는 데 12만7000유로를 지출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 유명한 사업가가 무솔리니의 생가가 있는 북부 에밀리아 로마냐의 포를리 공항을 그의 이름을 따서 ‘무솔리니’ 공항으로 개명하자고 제안했다. 아스콜리 피체노의 한 교장은 학교에 무솔리니의 초상을 내걸려고 했다.

 

 무솔리니의 이름을 주류로 다시 불러낸 정치인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였다. 그는 1994년~2001년 재임기에 지안프랑코 피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포스트 파시스트 보수주의자들을 연정에 끌어들이면서 이들의 주류정치 진입에 물꼬를 터줬다. 독일의 경우 패전과 동시에 파시즘은 정계에서 추방됐지만, 이탈리아의 경우는 완전한 과거청산 없이 전후를 맞았다. 1952년 파시즘 정당을 금지한 법이 제정됐지만 거의 유명무실했다2차세계대전 이후 냉전 국면에서 파시스트들이 주류사회로 재편입되는 기회를 잡으면서 이탈리아 현대사의 한 단락은 직시되지 못한 채 묻혀버렸던 것이다.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 민간인들을 독가스로 공격했다거나 알바니아와 그리스를 침공한 사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는 전후 한국 현대사의 중요인물들의 친일행적이 교육과정에서 소개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무솔리니는 미화됐다. 베를루스코니는 무솔리니가 반대세력을 벽지로 추방한 것을 “휴가 보냈던 것”이라고 농담했고, 마르셀로 델우트리 상원의원은 무솔리니를 “위대한 문화의 비범한 인물”이라고 찬양했다. 검은셔츠단으로 정치테러를 자행하며 일당독재의 공포정치를 편 그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대체할 유일한 이념으로서 파시즘을 대중선전매체를 통해 국민에게 강요했다는 사실은 기억에서 지워진 것일까. 무솔리니의 고향 프레다피오에서는 무솔리니의 이미지와 더불어 “믿으라, 복종하라, 싸우라” “포기하는 자에게는 저주를”같은 파시즘 시절의 문구가 새겨진 병따개, 재떨이, 기념주화, 셔츠, 와인, 맥주잔들이 ‘순례자’들에게 팔려 나간다. 


 이탈리아의 한 언론인은 “우리 국민은 무솔리니 정권(1922년~45년) 당시 벌어졌던 반유대주의 정책은 불편해하지만, 반정부세력을 탄압했던 일에 대해서는 무감한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다보니 사람들은 무솔리니를 광장마다 우체국을 세우고 열차 정시운행을 정착한 지도자로 기억하게 됐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 배고픔을 줄이기 위핸 ‘밀 생산 전쟁’을 주도하고 기업과 은행을 국유화해 이탈리아 경제의 정상화를 꾀하고 물가를 통제하며 ‘잘 살아보세’를 주도했던 개혁의 기수로 무솔리니를 되새기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좋았던 시절’의 아이콘일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작가 안젤로 멜로니는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랜 기간을 거쳐 ‘위대한 이탈리아인’으로 합의된 팝 아이콘”이라면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기독교인들처럼 무솔리니의 달력을 사는 이들의 90%는 파시즘 정당에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네오파시스트 단체들의 생각은 다르다. 카사파운드의 부회장 시모네 스테파노는 “누구든 그 달력을 사는 이들은 무솔리니의 업적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탈리아의 경기침체 속에 고통받는 대중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강력한 지도자를 희구하는 사회심리로 볼 수 있다. 1차세계대전 직후 경제난에 빠져졌던 이탈리아를 장악한 무솔리니는 1920년대 초 4년만에 20%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실업률은 80% 줄인 빛나는 ‘업적’을 갖고 있다. 그는 무자비하기 시칠리의 마피아를 ‘정벌’함으로서 치안도 확립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최대 국가부채를 짊어진 오늘날의 이탈리아, 이민자들마저도 짐싸서 본국으로 돌아갈 정도로 실업률이 높고 경제전망은 불투명한 이 ‘유럽의 병자’를 일으켜 세울 강력한 지도자를 이탈리아 국민들이 과거 속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스테파노 부회장은 “오늘날의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무솔리니처럼 은행과 금융을 정상화할 인물”이라면서 “우리 단체에 가입하려는 청년들은 무솔리니를 국부로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 청년은 “그는 노동자들을 위해 주택을 공급했다. 그건 로마 황제들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주장한다.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묻어버린 현대사가 어떻게 오늘을 왜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베를루스코니같은 이탈리아의 정치인은 ‘일 두체’의 이미지를 빌려 대중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이탈리아에서 우파정권의 장기집권을 끌어냈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과거에서 차용된 이미지는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임을 증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집권기에 이탈리아 경제가 곤두박질쳤으니 말이다. 


(주간경향 2013. 1. 15 )

Posted by 최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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