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회사 근처 분식집에서 저녁을 때우던 2010년 어느 겨울날이었다. 러시아어를 쓰는 젊은 백인 아빠가 두 살쯤 된 아기를 데리고 자리에 앉더니 갈비탕 한 그릇을 주문했다. 

사과처럼 볼이 빨간 아기에게 밥 몇 숟가락 물려주려는 것 같았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갈비탕처럼 한국적인 모습을 예상했던 건 아마 빈곤한 상상력 탓일 테다. 아빠는 국물에 만 밥을 그릇에 덜어 쓱 내밀었고, 어른용 숟가락을 고사리손에 쥔 아기는 얼굴에 밥알을 묻혀가며 씩씩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리광 없이 의젓했다. 한국식으로 무릎에 앉혀 밥을 떠먹였다가는 “나 혼자서도 잘해요!”라며 뾰로통할 것 같았다.

우리와 다른 육아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 또 다른 장면은 지난 가을 벨기에 브뤼셀 중심가에서였다. 앞서가는 보호자 자전거에 따라가는 아동용 자전거가 축으로 연결돼 씽씽 달리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뒷자전거에 탄 아이는 유치원생쯤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기 몫만큼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 우리식대로라면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아빠 허리춤을 꼭 쥘 나이였다. 

개인주의 문화가 강한 서양에서는 자기 삶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익히기 시작한다. 집단주의 문화에 바탕한 우리처럼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함께 자고, 모유를 수유하는 육아방식이 미국에서 ‘애착 양육’이라는 획기적 방식으로 소개될 정도로 문화차가 적지 않다. 이 같은 개인주의 문화는 책임도 개인에게 돌리는 성향이 강하다. 인류학자 레베카 포페노는 책 <팻>에서 니제르의 사례를 통해 두 문화의 차이를 설명한다. 

풍만함을 여성미의 으뜸으로 여기는 이곳에서는 ‘튼살 자국’을 칭송하는 사랑노래까지 있을 정도여서 여자아이들은 사춘기 때부터 체중을 불리는 비법에 귀를 쫑긋 세운다. 팔 부위 살이 틀 정도로 비만해지면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살을 못 찌우더라도 여자아이를 탓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그녀의 체질이나 병, 또는 누가 그녀에게 주술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서양 여자아이는 체중이 1㎏이라도 늘어나면 곧 소홀한 자기관리를 탓한다. “서양인은 사회의 관계망이 정체성을 결정할 만큼 단단히 매여 있지 않아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문화 중 어디쯤에 속할까.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개인 책임이 커졌지만, 그 책임을 나눠 짊어질 경제·사회적 시스템은 서양처럼 튼튼하지 못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니제르 사례에 비유해보자면 비만이 덕목이던 사회에 마른 하늘 날벼락처럼 빼빼 마른 모델 체형이 새로운 이상형으로 제시되면서 모두가 목숨 걸고 다이어트하는 격이다.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최고 수준인 통계가 달리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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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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